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타이라노 키요모리 (문단 편집) == 가족 관계 == >その先祖を尋ぬれば桓武天皇第五の皇子、一品式部卿葛原親王九代の後胤、讃岐守正盛が孫、刑部卿忠盛朝臣の嫡男なり。かの親王の御子、高見王、無官無位にして失せ給ひぬ。その御子、高望王の時、初めて平の姓を賜はつて、上総介に成り給ひしより、たちまちに王氏を出でて人臣に列なる、その子鎮守府将軍良望、後には國香と改む。國香より正盛に至る六代は、諸国の受領たりしかども、殿上の仙籍をば未だ赦されず >그 선조를 돌아보면 [[간무 천황]](桓武天皇)의 다섯째 황자(皇子), 1품 식부경(一品式部卿)[* 옛날 일본은 친왕의 품계와 관직 품계가 따로 있었다. 이건 친왕 품계다. 식부경은 우리나라로 치면 이조판서와 예조판서의 겸직쯤에 해당한다. 인사+의전 등을 담당했다.] 가즈라와라 친왕(葛原親王)[* 카즈라와라, 카즈라바라 등이라고도 읽으며 기타 읽기례도 더 있다.]의 9대(代)[* 달리 말해 카즈라하라 친왕의 '''8대 손'''이라는 소리다. 1대, 2대, 3대...를 셀 때는 시조가 1대가 되므로 당연히 대수에 시조가 포함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대손(代孫)은 시조를 제외하고 세고, 시조를 포함하려면 세손(世孫)을 쓰는 것이 널리 퍼진 관습이다. 그러니까 9를 살리고 싶으면 '''9세손'''이라고 해야 혼란이 적다(가장 인구가 많은 김해 김씨 기준 대/세와 세손은 같은 숫자를 쓴다). 그러나 각 집안 족보마다 원칙이 다르기도 하며, 지금의 원칙과 고문헌상 원칙이 또 별개인 경우도 있다. 많이들 헷갈리는 부분이다.] 후윤(後胤)으로 사누키노카미(讃岐守)[* 사누키는 [[사누키 우동]]으로 유명한 지금의 [[카가와]] 현 일대의 옛 이름. 카미는 4등관으로 구성되는 지방관의 최고 지위 즉 태수를 말한다. 때문에 사누키노카미를 '사누키 태수'로 번역하기도 한다.] 마사모리(正盛)[* 키요모리가 아니라 이 사람이 친왕 8대손이고, 칸무 천황 9대손이다.]의 손자요[* 타다모리가 아니라 키요모리를 가리킨다.], 형부경(刑部卿)[* 형조판서 비슷하다. 법무부장관 격.] 다다모리(忠盛)[* 카즈라하라 친왕 9대손, 칸무 천황 10대손, 사누키 태수 마사모리의 아들. 카즈라하라 친왕의 후손은 관직을 잘 얻지 못하고 몇 대 동안 지방을 전전했다. 그러다 키요모리의 아버지인 타다모리 때 황실에 발탁되어 중앙으로 재진출한다. 헤이케모노가타리 내 묘사에 따르면 인품도 되고 능력도 되고 기지도 뛰어나고 풍류도 겸비해서 토바 천황의 총애를 받지만, 눈깔이 사시에 출신이 천하다(...)며 중앙 귀족들의 온갖 인신공격과 시기를 받는다. 그래도 점잖게 넘기는데 아들 키요모리는 그러지 못해서--나 같아도 그러지 못하겠다--비극의 발단이 된다.] 아손(朝臣)[*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C%86%90|카바네의 하나]]인데 지체 높은 신하의 경칭이라 보면 된다.]의 적남(嫡男)[* 즉 키요모리는 칸무 천황 11대손이다.]이라. 저 친왕의 아드님 다카미 왕(高見王)은 무관무위(無官無位)로 하여 세상을 떠나셨더라. 그 아드님 다카모치 왕(高望王)의 때에 처음으로 다이라(平)라는 가바네(姓)를 내리시어, 가즈사노스케(上総介)가 되시고, 곧바로 '''왕씨(王氏)를 떠나 인신(人臣)에 드옵시니,'''[* 여기서 왕씨의 '씨'는 문맥상 특정 성씨인 [[왕씨]]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왕의 '씨족' 다시 말해 왕가 나아가 천황가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일본어 사전에서는 "천황의 자손으로 성(가바네)를 받지 않은 자. 율령제에서 2세 이하 5세 이상의 황윤을 가리키며 '~~왕'이라고 불린 황족(天皇の子孫で、姓を与えられてないもの。律令制で、2世以下5世以上の皇胤こういん。「…王」とよばれる皇族)"이라는 뜻으로 설명된다. [[덴노/칭호 표기 논쟁]]에서 보이듯 일본에서도 천황과 왕 둘 중에 어느 한쪽만이 경칭이고 비하라는 인식이 없고, 천황에 대해서도 '''메이지 유신 직전까지''' 왕이라고 잘만 불렀다.] 그 아들 진수부장군(鎮守府将軍) 요시모치(良望)는 뒤에 구니카(國香)로 고쳤다. 구니카로부터 마사모리에 이르기 6대, 여러 구니(国)의 수령이시긴 하였으되, 전상(殿上)의 선적(仙籍)은 여직 내려받지 못하셨더라. >----- > - [[헤이케 이야기]] 제1장 '기원정사',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선대를 설명하면서 정실인 타카시나노 아키코와의 사이에 [[타이라노 시게모리]], 타이라노 모토모리[* 키요모리의 차남. [[호겐의 난]] 때 불과 18세의 나이에도 성숙한 대응으로 세이와 야마토 겐지의 미나모토노 치카하루를 명예롭게 사로잡음(압도적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쌈싸먹지 않고 치카하루의 정정당당함과 기백을 높게 사 일단 회유하며, 어쩔 수 없이 싸운 뒤에도 그와 남은 부하들이 다치지 않게 곱게 제압하고 생포한다. 치카하루는 이후 사면된다.)으로써 난 초기에 결정적 공을 세웠으며, [[헤이지의 난]] 때도 활약했다. 동복형 시게모리와 더불어 인성과 실력을 갖춘 축에 속하는데, 안타깝게도 24세의 젊은 나이에 병사했다.--둘의 어머니 유전자가 덕망은 있어도 병약했나 보다-- 이후 그의 아들 유키모리는 형 시게모리가 맡아 길렀다.], 계실인 타이라노 토키코[* 남편의 성이 아닌 본성도 타이라 가문으로 이세 헤이시와는 다른 타이라 가문이었다.]와의 사이에 [[타이라노 무네모리]], [[타이라노 토모모리]], 타이라노 시게히라 등이 있었으며, [[타이라노 아츠모리]]는 그의 조카였다. [[다카쿠라 덴노]]의 황후인 [[타이라노 도쿠시]]는 그의 딸로 그녀의 아들인 [[안토쿠 덴노]]는 키요모리의 외손자가 된다. 또 다른 딸인 모리코는 [[고노에]] 가문의 당주 후지와라노 모토자네에게 시집보내 [[고노에]] 가문과 연을 맺었고, 장남 시게모리의 처는 고시라카와 상황의 측근 후지와라노 나리치카의 여동생을 맞는 등 [[공가|공경]]과 실세 집안과도 인연을 맺고 권력을 확대해 나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